
속눈썹 하나는 참 길구나.
헤르메스의 속눈썹이 얕은 바람을 만들었다. 작은 몸짓과 숨결 하나하나에 머리카락이 품으로 내려앉았다. 고요한 실내는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히 반응하며 긴장을 더했다. 적막 속에서 가장 부산스러운 것은 상대방이 눈치챌 수 없는 머릿속이었다. 그 안에서 시끄러운 잡념이 들끓었다.
베사는 바람이 불고 먼지가 나부끼는 곳에 사는 생물에 대해 떠올렸다. 그런 환경에 사는 생물은 눈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같이 속눈썹이 길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늘 섬과 다를 바 없는 엘피스는 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했다. 먼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바람만큼은 어느정도 불어올 것이다. 당신도 그럴까. 베사는 구태여 짤막한 의문을 화두에 올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이나 지식이 정정되는 걸 원치 않기도 했고, ‘그가 비행 생물의 일인자’라는 것과 ‘헤르메스의 속눈썹이 길다’는 논제에 인과를 구겨 넣고 싶던 탓이었다.
침묵을 고수하는 상대 덕에 헤르메스는 어색한 모양새로 몸을 꿈질거렸다.
맞닿은 이마, 흔들림 없이 눈을 들여다보는 시선, 혹여 새된 열기가 상대에게 닿을까 죽여둔 숨. 이러한 상황에서도 베사는 침착한 낯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 저기, 지금…….”
“응?”
“궁금한 건, 해소됐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헤르메스가 감사를 전하며 가면 아래의 얼굴을 드러내던 날, 베사는 잠들기 전까지도 아름다운 눈동자는 무엇인지에 대해 골몰했다. 떠오른 고민을 취향이라는 단어로 낙인찍고 싶지 않았다. 얼굴이 마음에 든 게 아니라, 그저 그가 눈길이 갈 만큼 특이한 것이라 변명하고 싶었다. 어쩌면 고대인의 눈동자는 현생 인류에게서 볼 수 없는 모양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을 내는 모양새가 신비로웠을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별처럼. 베사가 보았던 수많은 별과 고대인 몇의 얼굴을 뒤로한 채 보기 좋게 변명거리를 만들어냈다.
…… 베사. 형태가 불명확한 음성이 다시금 흩어졌다. 마주 닿은 눈동자가 머물 곳을 잃고 이리저리 맴돌다가, 끝내 눈꺼풀을 끌어내리며 시야를 차단했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빛이 사라졌다. 그제야 베사는 짧은 탄성을 뱉으며 몸을 내뺐다.
“…… 미안, 나도 모르게 다가갔네. 이렇게 가까이 보고 있을 줄은 몰랐어.”
변명 같은 말이지만 변명은 아니야……. 베사는 자신의 말이 구차하다는 걸 알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가면을 벗은 헤르메스의 잘못인가, 그 얼굴을 보고 '네 눈을 다시 보고 싶다'며 떼를 쓴 베사의 잘못인가. 고민하고 고민해도 후자의 책임이 명확했다.
어두운 꽃잎과 달리 그의 얼굴에서 밝은 감격이 떠오르던 날, 헤르메스는 단 한 번 가면을 벗었다. 이후에는 미덕에 맞게 상시 가면 착용했다. 그의 행위가 이례적이었음을 상기한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베사와 단 둘이 있는 순간조차 가면을 벗지 않았기에 아쉬움이 배가 됐다. 한 번 쯤은 다시 보여줄 거라고 믿었으니, 기대한 바가 이뤄지지 않자 되지 않는 억지를 부려가며 헤르메스를 곤경에 빠트렸던 것이다.
기회는 올 때 잡아야 한다. 메테이온이 마음에 들어 한 자. 순백색으로 빛나던 엘피스 꽃을 그와 같이 어두운 빛으로 물들인 자. 헤르메스의 개인적인 호감 때문인지, 혹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적절한 절차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직접 베사가 지내는 방의 상태를 봐주겠노라 제안했다. 사용하는 기물의 상태를 확인하고, 에테르가 모자라지 않는지 물으며, 부족한 부분은 직접 보강하는 간단한 절차였다. 시답잖은 확인을 끝낸 뒤 헤르메스는 괜스레 뜸을 들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적어도 베사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앞으로도 부디 불편함 없는 시간을 보내길……. 형식적인 작별 인사와 함께 은은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그 순간 도끼가 베사의 머리를 내리치는 듯 충동이 일었다.
보고 싶다, 다시 한번만 더.
그림자 속에서 반짝이고, 빛 속에서 그림자가 되는 그 눈동자를.
옷깃을 덥석 붙잡은 손길이 우악스러웠다. 힘이 들어간 손과 비교될 만큼 덤덤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부탁에, 헤르메스의 미소가 곤란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그가 대답을 고르며 유예를 가지려 시도했다. 그녀는 헤르메스의 팔을 안쪽으로 잡아당기며, 말 그대로 떼를 썼다. 안 될까? 에메크셀크에게 애원했을 때보다도 더 간절한 울림이, 꾹꾹 눌러 쓴 전보처럼 무거웠다.
“네가 어째서…… 보고 싶어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한 헤르메스의 패배였다. ‘제발, 헤르메스’라는 말에 그조차 껌뻑 넘어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고대인은 마음의 씀씀이가 좋은지도 모르겠다고, 베사는 순간 생각했다.
헤르메스는 가면을 벗으며 다시금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퍽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방의 주인은 틈조차 주지 않고 집어넣었던 의자를 빼내며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누가 봐도 그의 곤란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이 순간만을 고대하던 모습으로.
마주 앉은 자리에서 베사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가까이에서 볼래, 조금, 조금 더……. 벌어졌던 거리가 차츰 좁아짐과 동시에 헤르메스의 시선이 궤도를 이탈했다. 정착지를 잃은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음과 동시에 뺨이 화끈대고, 오래지 않아 시선을 피해버리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음에도, 두 사람이 떨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은 헤르메스에게 다가온 건, 베사의 호박색 눈동자가 아닌 그 자신의 탐구심이었다. 진실로 말하건대, 그녀는 공을 들였다고 확언할 만큼 세심하게 만들어진 사역마였다. 희박한 에테르와 뾰족한 귀를 제외한다면 겉으로는 ‘인간’의 외형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처럼 인간과 유사한 부분은 알 수 없는 불쾌함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관찰자 헤르메스는 그러지 않았다. 감탄하면 감탄했을 뿐 거북함은 커녕 이 생명의 존재 자체에 경이를 느꼈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자신이 가진 힘을 적재적소에 적용하여 다룰 수 있는 지능, 거기에 마음 한구석을 간질이는 따뜻한 체온…….
체온?
베사는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굽혔던 허리를 폈다. 어느새 헤르메스는 그녀의 그림자 안에 있었다. 일방적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모양새였으니, 몸의 중심이 기울어지는 건 당연했다. 금방이라도 제게 쓰러질 듯한 상대를 막아내기 위해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하지만 베사는 그마저도 예상했다는 듯 헤르메스의 팔을 잡아 내리고, 이마를 마주 부딪혀왔다.
“아…… 지금이 좋네, 잘 보여."
시야가 하얗게 번져가는 헤르메스의 상태를 베사가 알 턱이 없었다. 덤덤한 목소리는 그가 관찰지에 기록을 정리할 때처럼 정갈했다. 요지는 헤르메스가 옴짝달싹 할 수 없도록, 베사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그를 의자에 가뒀다는 사실이었다.
베사의 입장은 이랬다. 이곳의 헤르메스는 자신의 세계의 헤르메스와 다른 이이며, 자신의 미래에는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그곳에서 ‘파다니엘’이 저지른 일과 비교하자면……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애교로 칠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인과응보일 뿐. 헤르메스가 한 건 아직 아무것도 없지만 뭐 어떤가. 자신의 행위에 낯이 부끄러울 수도 있을지언정 고대인에게 베사는 ‘인간’이 아닌 ‘사역마’였으므로, 애당초 수치를 느낄 대상이 못 됐다.
이후,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떨어져 나간 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공기, 예상과는 달리 열기를 띤 헤르메스의 얼굴, 평소와 다를 바 없던 베사의 무심한 낯에 떠오르는 동요, 그런데도 여전히 서로를 막고 붙드는 손……. 충동으로 밀려났던 이성이 돌아오자 모든 게 발칙하기 짝이 없었다.
“……. 미안. 집중해서 몰랐어, 헤르메스. …… 미안해.”
베사는 연거푸 사과를 뱉어냈다. 머지 않아 몸에 힘이 풀린 듯, 팔걸이를 붙들며 털썩 주저앉았다. 더는 가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는 얼굴을 딱딱한 장식에 처박으면서. 속박에서 벗어난 헤르메스는 가면을 만지작댈 뿐 다른 무언가를 하지도, 어떤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싸늘한 분위기와 달리 홧홧해진 공기는 식을 줄 모르는 채 적막만을 상기시켰다.
미안하다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무릎께를 간지럽혀도 도통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베사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헤르메스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 눈을 굴렸을 때, 어느새 그는 얼굴을 가면으로 덮어 가리고 있었다. 가려진 얼굴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알아볼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열이 오른 뺨과 귀 뿐.
부끄러웠던 걸까? 개인적인 영역을 침범당해서? 이건 화를 내야 하는 부분이 아니던가. 하마터면 입술이라도 닿을까 봐?
실제로 그럴 리도 없지만, 이건 부끄럼보단 공포에 가까울 터였다. 머리가 나쁘면 몸으로 해결하는 베사에게 이런 문제는 어려웠다. 몸으로 벌린 일은 왜 몸으로 해결하기 어려울까…… 당연한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던 차였다.
“…… 아니, 내…… 잘못이기도 해. …… 미안하다.”
“당신 잘못이 어디 있다는 거야…….”
얇은 입술 새로 빠져나온 말은 사과였다. 잘못한 건 나야, 헤르메스.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 깐 베사가 다시금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가 어디에서 미안함을 느낀 건지 이해할 수 없고, 부끄럽게 만들어서 오히려 미안하다…… 는 말까지 했다면 형편이 나았겠지만, 그 끝은 의문문이었다.
“──그런데 왜 당신이 부끄러워 해?”
얼굴이 빨개질 이유가 어디 있어? 그래서 사과하는 거야? 미안한 것과는 별개로 짚어둬야 할 것 같아서…….
저보다 높은 곳에 있는 이를 좇아 눈동자를 굴렸다. 헤르메스는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시선을 피했다. 열 없는 태도에 베사는 그를 멀뚱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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