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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리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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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빛전/카이로스로 기억이 날아간 헤르메스가 아젬을 보며 기이한 부재(빛전)를 느꼈으면 좋겠어요


©퇴공님





 사람의 기억은 온전할 수 있는가?
 헤르메스는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갈 때, 불 꺼진 방문을 열 때, 장장 일곱 시간에 걸친 토론이 끝나고 바깥으로 나갈 때, 어딘가에 집중했다가 빠져나왔을 때, 그럴 때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자신이 현실과 갈라진 듯 했고, 정신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것은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대강당에 있는 달변가들조차 헤르메스가 느끼는 감각에 대해서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했고, 감정을 표현한 사전을 찾아보아도 그에 대한 답은 적혀있지 않았다.
 고명한 학자들을 찾아 광장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이번에도 허탕을 친 헤르메스는 넋을 놓은 채 샌들을 질질 끌다시피하여 대의사당 앞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뭘까? 뭐가 어긋난 것일까?
 그러나 거리를 함께 공유하던 사람들 중 누구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헤르메스는 차라리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통이라도 쳐 주기를 바랐으나 가끔 느껴지는 시선마저 그의 가면을 보자마자 금방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ㅡ저 사람은 누구지? 저기, 신발을 질질 끌고 걷는 사람 말이야.
 ㅡ쉿, 파다니엘 님이야…….
 헤르메스는 불현듯 자신의 이름에 걸린 무게를 깨달았다. 아, 그랬지. 지금의 나는 14위원회의 일원이다……. "파다니엘!" 그래, 내 직위이자 이름은 파다니엘이고 담당하는 일은 비행생물체와…….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어 제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러자 지끈거리는 두통과 동시에 현실감이 다소 돌아왔고, 뒤늦게나마 누군가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깨달은 헤르메스는 걸음을 멈췄다. 조금 전 들린 목소리가 착각이 아니라는 것처럼 저 멀리서 옅은 황토색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풀어헤친 여자가 자신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비록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아모르트에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젬.
 "당신이 새로운 파다니엘이구나."
 꼭 오랫동안 알았던 것처럼 친근하고 격의 없는 어조였다. 당신이라면 나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을까? 헤르메스는 아젬을 앞에 두고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말했다.
 "……아젬,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아젬과의 대화 뒤, 홀로 남은 헤르메스는 유리로 덮인 책상에 엎드려 생각에 잠겼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아젬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도움이 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고민하던 아젬은 성심성의껏 그의 질문에 몇 가지 질문을 되물었고, 헤르메스는 그녀의 답에서 몇 가지 가설을 도출해냈다. 비록 증거는 없으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들.

 '답은 구했어?'
 '아, 아니. 하지만 짚이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야……. 고마워.'
 '그렇구나. 그러면 그 짚이는 곳에 내가 관련되어 있을까?'
 '…….'
 당황한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아젬은 스치듯 속삭였다. '농담이야.' 그리고 헤르메스의 손에 꽃을 건넨 아젬은 그을 남겨두고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졌다. 아마 가야할 곳으로 떠난 것이겠지.
 서늘한 유리에 한쪽 볼을 붙이고 엎드려 있던 헤르메스는 조금 전에 있었던 대화를 복기하면서 유리에 비치는 꽃을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아, 이런 느낌이다. 흐릿하면서도 그곳에 존재하는ㅡ.
 엎드렸던 자세를 바로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헤르메스는 손에 잡히는 아무 종이를 자신 앞으로 끌어왔다. 종이 위에 원과 삼각형을 작도하던 중이었기에 깔끔하지는 않았으나 가장자리에 한 문장을 적을 수는 있었다. 헤르메스는 조금 전 떠올린 생각을 펜으로 휘갈겼다.
 이것을 '유리되다'고 표현하자. 나는 아주 우연한 계기로ㅡ당신을 만났기에ㅡ 세상에서 유리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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